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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서울시경 감식계장이 15년 만에 ‘양심 선언’한 이유 Level 29네이비술+5 조회수 : 72 |  26.10.04

<1974년 서울시경 감식계장이 15년 만에 ‘양심 선언’한 이유>

#뉴스클레임 #고상만

지난 9월 23일 개봉한 영화 <암살자(들)>를 두고 국민의힘과 박정희 기념재단, 육영재단측이 반발하면서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개봉된 첫 날, 이 영화를 예매하여 봤다. 
1975년 8월 17일 의문사한 장준하 선생 사건이 일어나기 근 1년 전인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을 어떤 식으로 영화화 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광복절 문세광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나도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일이었다. 문세광은 경상남도가 본적으로 195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재일교포 2세다. 그런 문세광이 1974년 8월 6일 한국으로 건너와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국립극장에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영부인 육영수를 피격한 것이다. 

문세광은 같은 해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후 3일 만에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한편 문세광의 사형 집행으로 논란이 종식될 줄 알았던 이 사건은, 그러나 2026년 9월 영화 <암살자(들)>이 개봉되면서 ‘현실의 뜨거운 이슈’가 되어 가고 있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극우세력과 박정희 기념재단측은 영화가 <표현의 자유>를 빙자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의혹이 마치 영화 <암살자(들)>을 통해 처음 제기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문세광 사건’의혹은 이미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언론에서 이 의혹을 처음 보도한 때는 1989년 9월이었다. 사건 발생 후 15년 만의 일이었다. 

사건이 벌어지고 다음날인 8월 16일, 현장 감식차 국립극장에 진입한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 경감의 <양심선언 인터뷰>가 그것이다. 인터뷰 당시 67세였던 이 경감은 이때 33년간 경찰 근무후 1983년 정년퇴직한 상태였다.

그는 강원도 춘천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경찰에 투신, 서울 시내 여러 경찰서에서 근무후 경찰대학 교수계장을 거쳐 서울시경 감식계장으로 근무하던 중 1974년 8월 운명의 사건과 마주한다. 그런 이 경감이 이후 15년간 침묵을 지키다가 1989년 9월호 <월간 다리> 인터뷰에서 자신이 품고 있던 의혹을 공개한 것이다.

관련 인터뷰에서 이 경감은 문세광이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것이 맞는지에 대한 '근거있는 의혹'을 제기한다. 현장 감식을 통해 알게 된 정보와 범행 10일 후 범인 문세광을 만나 '직접 듣고 본' 정보를 기초로 제기하는 이 경감의 의혹은 ‘누구도 쉽게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되는’ 주장이다.

이 경감은 크게 <5가지 의혹>에 대해 언급했다. 
먼저 ‘사건 현장에서 총알 탄두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은 점’이었다. 추후 알게된 사실에 의하면 청와대 경호실에서 문제의 탄두를 수거한 후 중앙정보부에 인계했다는데 이런 중요한 감정 대상을 '감식팀에 제공하지 않고 숨긴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이는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총알이 누구의 총에서 발사되었는지 알 수 있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감춘 것'이다.

더 놀라운 증언은 ‘문세광의 권총이 청와대 경호실 것과 같은 리벌버 종류’ 였다는 것이었다. 

대통령 행사장에 한국 말을 전혀 못하는 문세광이 비표도 없이 진입한 것도 의아한 일이데, 청와대 경호실과 같은 ‘스미스 웨슨 5연발 리벌버’ 권총을 문세광이 어떻게 이용했는지 이 경감은 납득하지 못했다.

특히 문세광이 첫 발을 오발하여 자신의 대퇴부를 관통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했는데. 이 역시도 상식밖이다. 이 경감은 사건 발생 10일 후에 문세광을 직접 만났다고 한다. 그때 문세광은 대퇴부 관통상을 입었다는 수사당국의 발표와 달리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다녔다는' 것이다. 

대퇴부 관총상이 사실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경감은 이외에도 여러 의혹을 제기하며 ‘육영수 여사를 피격한 범인은 문세광이 아니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그러면서 “진범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인터뷰 말미에 “(사건) 당시 내가 이것을 공개하였더라면 우리는 모두 죽었을거요.”라는 충격적인 말도 남겼다. 안타깝게도 이건우 경감은 이 인터뷰를 남기고 10년 후인 1999년 세상을 떴다.

하지만 이 경감의 양심선언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언론에서는 이 경감의 증언을 이후에도 보도했다. 
대표적인 방송이 2005년 2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 - 누가 육영수 여사를 쏘았는가>와 같은 해 3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육영수와 문세광>, 그리고 2021년 4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편이었다. 그러다가 2026년 9월, 영화 <암살자(들)>로 이어진 것이다.

영화는 ‘반발하는 그들의 주장처럼’ 대통령 박정희에 의해 ‘영부인이 피격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문세광이 아닌 제3의 저격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과 당시 수사가 제대로 된 것인지를 취재하는 언론 기자의 사투를 서사적으로 담고 있다.

이건우 계장 역시 1989년 <월간 다리> 인터뷰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에 대해 ‘사건의 시나리오를 짜 놓은’ 박정희 정권 내 <암투의 산물>이 아니냐는 자신의 평가를 말했다. 그러면서 인터뷰 말미에 이건우 경감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그 의미가 무거웠다.

“나는 부도덕한 정권 밑에서 권력의 시녀 노릇으로 한평생을 보낸 사람이오. 그 정권들이 육 여사도 죽게 했소. 이제 불행한 사건들이 없기를 바라오.”

하지만 이런 가치있는 의혹 제기에 오히려 진실을 밝히자며 나서야 할 대상들은 애써 눈 감고 ‘사실을 왜곡하는 고의적인'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있어 대단히 유감스럽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2년 방북했던 박근혜에게 북한 김정일이 ‘북과 관련한 피격 사실을 인정하며 사과했다'는 것이다. 명백한 사실 조작이다.

이는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2002년 박근혜 대통령 방북 당시 북한 김정일이 직접 육영수 여사 시해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진 논란이다. 장 대표의 주장처럼 김정일이 사실로 인정했다면 논란은 이것으로 끝날 것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북한 김정일은 1968년 남파 무장공비에 의한 <1.21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사과한 것이었다. 2002년 당시 보도한 <한국일보>도 기사 말미에서 당사자인 박근혜가 측근을 통해 ‘육영수 피격사건 사과는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도 국민의힘 장 대표 등은 왜 거짓말을 하나.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이 사건에 대해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조사하는 것이 옳다. 

극우 집단과 일부 정치권에서는 “5.18 민주화운동도 이런 식으로 왜곡해서 영화를 만들어도 표현의 자유라고 할꺼냐?”며 황당한 반박을 하기도 한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미 여러 차례 국가 기관이 나서서 진상을 조사한 사건이다. 

그 결과로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광주시민을 집단 살해한 사실이 밝혀진 것이고 ‘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면 처벌하는 법’을 여야 합의에 의해 국회가 법으로 제정한 것이다.

그러나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은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의혹 사건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사건이 일어난 그때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아 ‘그들이 스스로’ 의혹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참에 ‘의문을 정리하고 진실을 명백히 하자고’ 제안한다. 

당시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수거하여 보관중인 것으로 알려진 육영수 여사 피격 탄두를 확인하면 누구의 총에서 발사된 것인지 명확히 정리할 수 있지 않겠나. 이를 통해 더 이상의 논란을 끝내자. 그게 옳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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